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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이름:오탁번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3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제천 (게자리)

사망:2023년

직업:시인

최근작
2024년 2월 <속삭임>

굴뚝과 천장

이 소설책은 이상하다. 낱권으로 된 창작집도 아니고 가지런한 소설전집도 아니다. 이름을 『오탁번 소설』 1, 2, 3, 4, 5, 6으로 했다. ‘오탁번 소설’ 외려 ‘소설 오탁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 안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나’가 헤살 놓는다. 한국전쟁, 피란, 배고픔과 가난, 좌절하는 젊음의 분노와 저항이, 느릿느릿, 가파르게, 들쑥날쑥하는 이야기가 말짱 서사적인 허구가 아니라 어느 특정인의 아롱다롱한 전기적 기록 같다. 60여 편의 소설 속에는 배고파서 우는 소년이 있고 절망에 몸부림치고 세상의 높은 벽 앞에 맨손으로 돌진하는 무모한 젊음이 있다.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혼자 외로웠다. 1969년 「처형의 땅」으로 등단했으니 반세기가 다 됐다. 나도 한때는 부지런한 작가였다. 80년대까지는 소설에 주력하면서 시는 ‘현대시’ 동인지에나 발표를 했었다. 「처형의 땅」의 등장인물인 ‘우리들 중의 하나’가 나의 다면적 자화상이라면 「굴뚝과 천장」의 ‘그’ 또한 지울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다. 요즘 독자들은 나를 ‘시인’으로만 알지 싶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는 하루 열 번도 넘게 내 시가 나비처럼 날아다니지만, 소설은 가물에 콩 나듯, 그것도 중고책 판매 사이트에서나 코빼기를 잠깐씩 비친다. 작가의식 속에는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신비한 패러다임이 있다. 내 문학적 영토의 암사지도에는 악마와 천사가 가위바위보하고 소년과 노인이 숨바꼭질하는 산이 있고 섬이 있다. 시와 소설이 넘나들며 소나기가 내리고 누리가 쏟아진다. 그래서 나의 시에는 앙증맞은 서사가 종종 보이고 또 소설의 한 부분을 떼어내면 그냥 시가 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1부터 4까지는 발표 순서대로 작품을 수록한다. 그래야지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펼쳐지는 서사적 풍경이 곧이곧대로 보인다. 좀 긴 소설은 5와 6에 따로 앉힌다. 30년, 40년 전에 냈던 절판된 창작집과 그 후에 발표한 소설을 몽땅 불러내어, 헤쳐 모엿! 시켰다.

달맞이꽃

나는 지금도 1951년 겨울 경상북도 상주까지 피란 갔던 일을 잊지 못한다. 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불에 타서 흔적도 없었고 먹을 식량도 하나 없었다.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도 모르면서 힘없는 민초들은 생존을 위하여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다. 바닥에 가마니를 깐 임시학교에서 노래를 배우고 반공방일의 구호를 외치며 국어와 산수를 배웠다. 교과서도 제대로 없어서 선생님이 “동해물가 시작!” 하고 외치면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입학하기 전에 어깨너머로 몇 글자 배운 탓이었을까. 나는 처음에 그 노래 제목이 ‘동해물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교과서가 나왔을 때 보니까 ‘애국가’였다. 다들 아침밥을 굶고 다녔다. 공부하러 학교에 다닌 것이 아니라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학교에 갔다. 유엔에서 원조한 식량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외국 여행을 하면 할수록 천등산과 박달재 사이에 있는 내 고향이 더욱 또렷하게 떠오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가난에 짓눌려 원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내 고향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독약과도 같은 매력과 못생긴 산과 시시한 강물이 주는 저 천덕꾸러기 같은 아름다움이 내 문학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84년 가을, 단편소설 세 편을 썼다. 「아가의 말」, 「달맞이꽃」, 「저녁연기」는 마치 탕아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오줌을 눌 때의 평화로움으로 썼다. 「우화의 땅」은 고려사 열전을 읽고 쓴 작품이다. 벼슬을 하기 위하여 제 아우나 아들을 거세시켜서 내시로 들여보낸 놈들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사람의 본능 속에 숨어있는 악마와 야만의 몹쓸 모습에 정말 놀랐다. 내가 겪은 80년대가 바로 ‘우화의 땅’이었다.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찬탈하는 자들이나 지식과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권력에 빌붙는 지식인들도 고려 시대 제 자식의 불알을 까는 놈들의 낯짝과 다를 게 없었다. 네미!

맘마와 지지

발단-전개-위기-절정-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구조처럼 내 생애도 이제 ‘전개’와 ‘위기’의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는 1971년에 대학원 국문과를 마치고 육사 교수부 국어과에서 현역 교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전역 후 수도여사대 전임을 거쳐 1978년 가을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나의 생애는 어떻게 전개되어 위기와 절정을 겪으면서 대단원에 도달할 것인가. 일주일을 반으로 나눠서, 앞은 대학교수로서 뒤는 작가로서 살기로 독하게 작정하고 암흑의 시공간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현실과 이상이 서로 패대기치고 정신과 육체가 드잡이하는 적의만 번뜩이는 시대 상황이었다. 런던대학의 윌리엄 스킬런드 교수(1926∼2010)는 나와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는데 내 소설 「불씨」(문학사상, 1975)를 런던에서 읽고 번역을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외국인이 서울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를 읽는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낯모르는 신인작가의 소설을 번역까지 했다니 기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좀 아득한 심정이 되었다. 스킬런드 교수는 일본소설과 한국소설을 전공한 학자로 영국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름난 동양학자였다. 1983년 여름 해외연구교수로 미국 하버드대학에 갈 때 내가 번역한 시 몇 편과 함께 「불씨」의 영역본을 가지고 가서, 미국인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듬해 여름 런던에서 스킬런드 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자오선도 그와 함께 보았다. 「우화의 집」은 1972년 단행된 10월 유신을 톡 까놓고 풍자 비판한 소설이다. 그때 나는 육군 대위로 육사 교수부 교관이었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셈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강의실에서 분필을 잡고 판서를 할 때도 손이 마구 떨렸다. 아무리 모진 태풍이 불어도 그 ‘태풍의 눈’은 오히려 바람도 약하고 고요하다더니…… 태풍은 나를 무너트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나는 언제나 문학작품으로서 현실을 다룰 때, 그것이 문학 자체로 완벽한 구조가 되지 않으면 이미 문학의 위쪽이거나 아래쪽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밥 냄새

40년 동안 걸어온 시의 궤적을 육필로 베껴 쓰면서 느끼는 감회는 그냥 시집을 묶을 때와는 다르게 아주 남다르다. 내 고향 길섶의 민들레 홀씨여. 백두산 천지의 하늘이여. 스스로 눈물겨운 시인의 영혼 앞에 경배한다.

손님

석유를 아끼느라고 등잔 심지를 낮춘 어둡고 흙내 나는 방에서, 손가락이 곱아 호호 입김을 불며 몽당연필로 국어숙제를 하던, 백운초등학교 1학년 오탁번 꼬마에게 나의 일곱 번째 시집『손님』을 바친다. 2006. 12 원서헌遠西軒에서 오탁번

포유도

이제는 신문과 방송도 인터넷과 모바일로 제작하는 1인 매스컴 시대가 됐다. 모두가 기자이고 아나운서이다.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이룬 구조보다 더 기막힌 허구가 초 단위로 생산되었다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SNS를 통하여 무한대의 속도로 뉴스와 논평이 퍼지면서 패싸움을 한다. 어느 게 진짜이고 어느 게 가짜인지 종잡을 수 없다. 일단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타인의 소외와 분노는 도외시한다. 오직 나의 기득권과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상대를 공격한다. 별별 야릇한 말장난이 판을 치고 사회 전체가 뜬소문으로 뒤덮인다. 얼마 전 남북이 발표한 평양선언과 판문점 군사협정을 국회 동의 없이 내각에서 비준하자 야당이 들고 일어났다. 당국은 북한은 우리 헌법상 국가가 아니므로 국회 동의는 안 받아도 된다고 맞섰다. 엉뚱한 말싸움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망칠지도 모른다. 내가 북한의 최고 지도자라면, 즉각 핵미사일 일발 장착! 발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가가 아니라고? AI가 바둑을 두고 소설을 쓰고 자동차를 모는 시대가 됐다. 기술은 날로 발전한다. 미리 유전자 검사를 해서 질병 위험이 적은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켜서 다운증후군이나 혈우병을 예방하고, 부부의 정자와 난자에다 더 건강한 다른 여성의 난자를 사용하여 심장질환을 차단하는 이른바 ‘세 부모 아기’를 만든다는, 꿈 같기는 해도 딱 벼락 맞을 기술이 나왔다고 한 게 몇 해 전이다. 또 최근에는 아예 인공수정을 할 때 IQ가 낮은 유전자를 폐기하여 머리 좋은 아기만 낳게 하는 기술이 나왔다고 한다. 이웃과 더불어 대지를 경작하고 사랑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호모사피엔스는 이미 멸종의 시간 위에 서 있는 것일까. 나는 지구 종말이 오는 그날에도, 액막이연을 날리고 대보름날 달집 태우며, 하날때, 두알때, 사마중, 날때, 염낭, 거지, 팔때, 장군, 고드래, 뽕! 놀이를 하겠다. 왕할머니는 막내 증손자를 안고 누워 잠이 드신 모양이었다. 문 여는 소리에 아기가 끙끙거리며 왕할머니의 젖가슴을 파고들며 대춧빛 젖꼭지를 오물오물 빨기 시작했다. 아기의 궁둥이를 다독다독 다독거리는 왕할머니의 검버섯 핀 손이 호랑나비 날개만큼 가벼워 보였다.

혼례

언젠가 어느 학생이 날 보고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영화배우와 닮았다는 말을 했다. 나중에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그 영화를 보고 나서야 나는 학생이 말한 뜻을 알아차리고 실소를 했다. 생김새가 아니라, 내가 평소에 하는 꼴이 그 배우와 흡사한 것이었다. 사실은 그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도 내 강의실 풍경은 좀 야릇하기는 했었다. 획일적이고 딱딱한 강의는 차마 하지 못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영화배우를 닮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닮았다고 해야 맞는 말이었다. 창작론 강의실에서는 학생들과 담배도 노나 피웠고, ‘자목련이 있는 데는 어디?’나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몇 그루?’같은 시험문제를 내기도 해서 학생들을 깔깔 웃게 만들기도 했다. 교양국어 시간에는 두꺼운 국어교재를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왜 이렇게 교재가 두꺼운지 아느냐. 교수들이 인세를 많이 받으려고 책값을 올리기 위해서 한 짓이다. 나도 공범이며 종범이다. 학생들은 이런 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 강의시간에 다루는 부분만 찢어서 가져와야지 새 교재가 아깝다고 그냥 들고 오는 학생은 낙제를 시킨다고 엄포를 놨다. 교재에 실린 글을 다룰 때도 주제와 내용을 요약해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글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교재가 틀려먹었다는 점을 하나하나 따져보는 시간이었다. 한 단원이 끝나면 그걸 찢어서 코를 풀기도 했고 어떤 학기에는 종이 비행기를 접게 해서 강의실에서 날리기도 하였다. 얼마 전 오랜만에 이어령 선생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가 정년하고 10년이 되도록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고 말하자, 당신은 젊었을 때 서른 살까지 산다는 것은 상상도 안 했다고 했다. 이처럼 그와 나,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모두가, 앞뒤 재지 않고 죽음을 코앞에 둔 것처럼 절실하게 살아왔다. 순간마다 죽음을 예감하며 이어가는 생명력은 헤아릴 수 없는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나의 의식 속에서는 언제나 어린 시절의 꿈과 가족의 사랑 그리고 전쟁의 공포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그때그때 아름답게 또 참혹하게 꿈틀거린다. 나는 그놈들을 불러내어 너나들이하면서 소설을 썼다. 소설 한 편을 끝내면 등장인물과 함께 죽었다가 담날 새벽이면 다시 눈을 뜨고 현실과 몽상을 가로지르는 작두날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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