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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신주

최근작
2024년 5월 <확률론적 외톨이 모형>

공산주의자가 온다!

SF가 지녀야 할 상상력이란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 대부분은 지금(글이 쓰인 지금이 아니라 읽히고 있는 지금)은 너무 당연하거나 상식이 된 것들이 미처 우리 모두에게 소개되기도 전에, 혹은 이름 붙여지거나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전에 쓰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SF가 지녀야 할 상상력이란 무언가를 따라잡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일찌감치 그 무언가의 도착점에 이미 다다라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물론 그 둘 중 무엇 하나라도 확실히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겠습니다.

균형 잡힌 기적

진짜 무서운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무서워지려거든 어디가 어떻게 무서운지 분위기를 잡아야 합니다. 설명을 늘어놓아야 합니다. 이런 태생적인 모순이 무섭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무섭습니다. 웃기려고 한 이야기가 웃기지 않으면 무엇이 됩니까? 우스갯소리에서 ‘우스’를 빼면 알 수 있습니다. 무섭자고 한 이야기가 무섭지 않으면 무엇이 됩니까? 그 답을 찾을 때까지 이야기들을 풀어헤쳐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기다리며 꾸는 꿈

몰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얼마나 자주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얼마나 모르느냐 하는 것을 모르더라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어야겠습니다. 심지어는 읽는 이가 모르는 무언가를 항상 알고 있어야만 하는 쓰는 이가 모르더라도 재미있어야겠습니다. 모르는 구석이라곤 전혀 없이, 쓰는 이에게 낱낱이 파악된 이야기란 사실 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사실 읽는 이가 쓰는 이를 모르고 더불어 쓰는 이가 모른다는 사실도 모를 때야말로 이야기는 가장 재미있어지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 영문 모를 소리들이 얼마나 맞는 이야기일지는 모릅니다. 시험 삼아 각 문장의 첫 글자만 모아 읽어보세요. 한층 더 모르겠습니다.

일곱 번째 약속

판타지는 믿음의 장르입니다 판타지는 믿음의 장르입니다. 일단 쓸 게 없는 작가의 말에 이런 안일한 서두부터 던져놓고 보면 그 뒤로 말들이 알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붙어주지 않을까 싶은 그런 믿음입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 작중 인물들이 그 모순으로부터 몸부림치고 고뇌할수록 맛이 깊은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판타지라는 명목하에 인물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없는 행동의 갈림길과 휘두를 수 있는 선택의 가짓수 덕에 괴리는 더욱 커지고 이야기 또한 더욱 무르익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훌륭한 이야기들이 여기에도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2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 (특별보급판)

중단편 대상 <내 뒤편의 북소리>, 이신주 글을 쓰다 보면 징검돌을 놓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이 안 보이는. 그래서 내가 방금 놓은 돌이 떠내려갔는지, 아니면 어떻게 잘 안착하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다가 이제 도저히 같은 자리에만 있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겅중 내 징검돌이 있을 법한 자리로 뛰어보았습니다. 다행히 단단한 바닥과 만났네요. 이곳에 얼마나 머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눈 가리고 던져댄 징검돌들은 아직 이곳저곳에 있고, 또 어쩌면 지금 있는 이 바닥도 생각보다 널찍하고 쾌적한 곳일지 모릅니다. 그럼에 지금 이 순간의 성취를 최대한으로 붙잡고 즐기며 다시금 훌훌 뛸 수 있는 힘을 얻을까 합니다. 미련한 징검돌지기의 바닥이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쇼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우주선이 어딘가에 불시착하고 너무나도 황량한 외계 행성이라고 생각하던 우주비행사들이 서로 반목하다가 결국 살인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사실 자기네가 떨어진 곳이 지구의 너무나도 황량한 네바다 사막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에피소드가 끝납니다. 이것과 비슷한 배경에다, 마찬가지로 각광받는 클리셰인 ‘죽음을 놓지 못하고 환상을 헤매는 사람들’ 같은 소재를 엮고 비틀어 써보고 싶었습니다. 가장 슬픈 이야기는 눈물 콧물 다 짜는 이야기가 아니라 잊혀진(아니면 아예 읽힌 적도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지구를 구하고 싶어 한 우주비행사들은 자기들이 지구를 죽인 것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열폭풍에 휩쓸려 증발한 지구의 시민들도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양쪽 다 서로 악의라곤 한 톨도 없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영영 알 길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이거야말로 정말 슬픈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확률론적 외톨이 모형

같은 것을 두고도 할 수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고, 다른 것을 두고도 할 수 있는 같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SF는 그 모두가 동시에 진행되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별천지의 배경과 전제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나오기도 하고, 반면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배경 속에서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발돋움하는 무언가도 있으니까요. 꼭 SF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말이 다 그렇지요. <이 세계 귀환담> 18년 여름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실피움, ‘1945년종전의규정에의한학교졸업자자격인정령’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단어들로 생각을 굴리다 보면 소재를 구하기 쉬울 때가 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나 그런 뉘앙스를 포착하면 글로 다듬기 쉬워지니까요. 물론 정말 평범하지 않은 장인이라면 평범한 단어들만으로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평범하게 떠올릴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을 평범하게 유지해야만 평범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지 알 수 있습니다. <2집> 21년 여름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다소곳이, 덕목, 서슬, ‘카피약’입니다. 제네릭이라고도 부르는 카피약은 개발된 약의 특허가 만료되어 다른 회사에서 동일한 성분으로 출시된 약을 뜻합니다. 글을 쓸 때는 없던 여러 종류의 생성형 AI들은 만들어진(Artificial) 지성의 머리글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혐오스러운(Abominable) 지성의 줄임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생각이 무엇인지, 그런 게 있기나 한 건지에 대한 질문과 그에 항변하는 대답의 양은 언제나 불균형한 모양새를 유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완의 삶> 17년 여름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사진은 진창에 빠진 차를 밀고 있는 사람들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과학자들입니다. 사진은 엄청나게 못 찍거나 잘 찍지 않은 이상 웬만하면 그 안에 이미 자세하게 이런저런 것이 규정된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출발한 생각들은 글이 되기보다는 팔다리가 얽매인 채의 짧은 발상에서 그칩니다. 무언가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그들이 연구하는 무언가의 시선에서, 특히 그 무언가가 원래는 시선을 가질 수도 없는 무생물이었을 때의 상황으로 억지로 탈출을 시도해볼 수 있겠습니다. <부분점수> 21년 여름의 글입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일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혹은 외인이 뒤섞여 저질러진 아주 작은 실수에도 그야말로 ‘삔또’가 나가버려 될 대로 되라고 손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 자신이 잘하는 것이고 계속 물 흐르듯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저지르는 순간 그때까지의 자신의 역량과 노력 전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부분점수라도 챙겨야겠습니다. <식후경> 20년 겨울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저녁달, 옥수수, 수호지입니다. 그 밖에도 북미 식품기업 팝시클 사의 90년대 ‘팝시클 존’ 선전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의 글에 ‘도움이 된’ 것들을 이것저것 열거하기 시작하면 글과 같거나 더 긴 분량의 무언가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뭔가가 되거나 되지 않을, 뭔가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찾거나 만들고자 하면 얼마든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야말로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두루 살핀 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관으로 녹여낼 수 있는 생각의 힘이겠습니다. <유한무한> 19년 가을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초장, 선봉대, 폴터가이스트입니다. 초장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혹시 회를 찍어 먹는 초고추장이 아니라 일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나요? 글에서 미각만큼이나 홀대받는 감각도 드뭅니다. 대접받기로는 시각이 으뜸이고(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다음이 청각이고(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따금 후각과 촉각이 조망 받는 한이 있더라도, 미각은 아예 화려한 묘사를 대동한 채 글의 중심이 되거나 서술 내내 전혀 언급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오감을 두루 자극할 수 있는, 그래서 실상은 종이에 쓰인 평면의 텍스트에 불과할지언정 읽는 이의 상상력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그런 글이 가장 좋겠습니다. <밀실진담> 20년 겨울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분신자살, 옷걸이, 뺑소니입니다. 여섯 개의 무언가들은 의도한 부분과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 뒤섞여 전부 어딘가에서 본뜬 모양이 되었습니다. 단 하나만으로도 작품의 시작과 보통은 끝을 장식하는 무시무시한 것들을 여럿 모아놓고, 반대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께느른한 분위기에 담가 휘저으면 뭐가 나올지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작은 발걸음> 20년 여름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세일러복, 스포트라이트, 폭동입니다. 어리둥절해지는 조합인데다가 글과 관련도 없어 보입니다. 가끔은 침목이 되라고 괴어 둔 단어들을 벗어나 전혀 엉뚱한 모양과 방향으로의 글이 완성되곤 합니다. 우선순위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하나의 글을 창안하는 것이 물론 주어진 단어들을 고분고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규칙을 깨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이미 깨진 것을 두고 스스로를 혹독하게 담금질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넘어가는 자세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진짜 도움이 된 것은 <갓 오브 워>(2018)에 등장하는 일련의 발키리들입니다. <확률론적 외톨이 모형> 17년 겨울의 글입니다. 도움을 준 단어는 기둥, 거울입니다. 제목의 원안이 된 어떤 과학 용어가 있었지만 지금 다시 찾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용어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도 확정할 수 없는 공백이란 실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희망의 장소일지 모릅니다. 이런 식의 얄팍한 문장만은 그러나 그 안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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